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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든지 ‘그 사회를 근본적으로 규정짓는 원칙들’이 존재한다. 물론 사회마다 그 내용은 다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자신의 소질에 맞는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하게 할 것’ 등이 다양한 사회에서 원칙으로 다양하게 제시된 것들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신자유주의도 당연히 자신을 근본적으로 규정짓는 원칙들이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자유가 모든 것을 우선한다. 그리고 시장의 자유에 대한 갈망은 자유주의에서부터 비롯됐다. 프랑스 사회학자 알렝 투렌은 자유주의를 금융 자본주의가 내세우는 시장 제일주의 이데올로기 그 자체로 파악하고 있으며, 금융 자본주의의 독주와 동의어에 다름 아닌 자유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고 경고한다. 물론 안드레 토셀같은 이는 시장 위주의 경제 이념과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한 정치 이념의 양면이 자유주의에 동시에 있다고 보고 있다. 자유주의의 탄생? 자본주의의 탄생! 전통적으로 자유나, 동등한 인간의 가치나, 민주적 결정이나 법의 지배나, 소유권의 존중 등이 자유주의가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가치다. 자유주의는 전통적으로 사회계약론에서 출발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적 합의를 통해 국가가 등장했다고 주장하는 사회계약론은, ‘합리적 개인들의 합리적 합의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합리적 개인들에 의한 계약은 자유주의자들의 머릿속에서 사변적으로 구성된 역사일 뿐, 현실의 역사에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도, 합리적인 개인들에 의한 계약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자본주의의 요구에 의해 공동체의 파괴와 개인의 확립이 진행됐을 뿐이다. 자유주의는 이런 자본주의의 요구의 산물이다.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는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먹고 살았다. 개인이 생산과 소비의 주체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생산과 소비의 주체였다. 여기서 공동체는 가족과, 가족을 넘어선 문중(가문)으로 존재했다. 내가 농사를 짓고, 그 수확을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가족)가 농사를 짓고, 그 수확을 우리 공동체(가족)가 가졌다. 내가 함께 일하는 형보다 생산력이 높으니까 형보다 밥도 많이 먹어야하고, 옷도 좋은 옷을 입어야하며, 재산 처분에 대한 발언권도 그만큼 높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홍길동이 관직에 나가더라도, 개인 홍길동이 관직에 나간 것이 아니라, 홍씨 문중(공동체)의 길동이가 관직에 나간 것이 된다. 나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이 바로 우리 공동체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이고, 또 공동체를 위한 것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나의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이 분리되지 않았으며, 공동체의 이익이 나의 이익이라는 생각은 아주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는 격물치지가 바로 수신이며, 수신이 곧 제가였고, 제가가 바로 치국이며, 평천하였던 셈이다. 시장과 자본주의는 공동체로부터 침해받지 않을 자유와 법적인 평등을 요구한다. 자유가 보장돼야 거래의 자유가 확보되며, 사유재산권이 보장돼야 시장과 자본주의는 작동가능하다. 그리고 거래 당사자는 법적으로 평등해야 공정한 시장의 룰은 작동한다. 실질적으로 평등해서는 결코 안 되며, 법적으로만 평등해야 시장과 자본주의는 작동가능하다. 이를 위해서 자본주의는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개인과 개인의 교환 관계로 전환시켰고, 노동도 개별 노동자와의 계약이라는 관계를 요구했다. 결혼도 집안과 집안의 결혼에서 개인과 개인의 결혼으로 변했다. 활동의 주체를 공동체에서 개별화된 개인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요구에 의해 등장한 이념이 자유주의며 자유주의는 공동체 중심의 사고를 개별화된 개인으로 전환시킨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처럼 모든 사고의 중심으로 개인을 확립한 것이다. 이성적인 ‘나’의 확립은 ‘나’의 보편화로 이어진다. 나에게 합리적인 것은 모두에게 합리적인 것이 되고, 나에게 허용되는 것은 모두에게 허용되며, 나에게 금지된 것은 모두에게 금지된다. ‘나’의 보편화가 바로 자유주의의 평등이며, 이를 통해 보편화된 나에게 주어질 수 있는 권리와 책임이 규정된다. 나에게 주어진 권리와 책임은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권리와 책임이다. 활동의 주체로 확립된 자유주의의 개인은 공동체로부터 자유롭다. 공동체의 관습이나 신분적 위계질서는 타파해야하는 것이 된다. 학연, 지연에 얽매이는 것도 전근대적 병폐일 뿐이다. 더 나아가 공동체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이 우선하며, 이는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개인의 권리로 주어진다.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개인의 권리 중 핵심은 바로 ‘소유권’이다. 자유주의에서 사유재산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소위 ‘천부인권’의 핵심인 셈이다. 자유주의 민족(국민)국가의 탄생과 죽음 자본주의는 보다 넓은 시장과 ‘사유재산’을 지켜줄 강력한 정부가 필요했다. 이런 자본주의의 요구에 의해 민족(국민)국가는 탄생했다. 이는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일면 사실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요구에 의해 건설된 민족(국민)국가는 서구 제국주의 침략 국가들에게서만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침략 국가들의 역사는 보다 넓은 시장과 사유재산의 보호라는 자본주의의 요구에 의해 민족(국민)국가가 탄생했다는 점에서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식민지 침략이라는 만행을 자행했다는 점에서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모든 민족(국민)국가가 자본주의의 요구에 의해 탄생했으며, 제국주의 침략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수의 제국주의 침략국가가 전 세계 모든 국가를 대표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사대주의의 일환일 뿐이다. 전 세계 대부분의 민족(국민)국가들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투쟁의 산물로 탄생한 것이다. 제국주의 침략의 정당화도 자유주의의 몫이다. ‘나’를 보편화하는 자유주의는 ‘나’와 ‘너’의 ‘다름’을 무시해야 하기에, 그 태생 자체가 침략적일 수밖에 없다. ‘나’를 보편화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 모두가 나와 동일한 이성을 가져야 하고, 동일하게 생각해야 하며, 동일한 가치를 가져야한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세계시민, 보편시민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문명화’란 이름으로, 혹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란 이름으로 제국주의 침략을 강변한다. 모두가 자신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의 세계시민, 보편시민은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소위 야만인들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침략의 과정에서 수많은 저항적 민족(국민)국가들의 탄생을 목도한 침략자들은 민족(국민)국가를 통하지 않고도 시장을 확장할 수 있으며, 전 세계적인 착취를 하는데 민족(국민)국가는 거추장스럽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침략자들은 저항자들에게 호통 친다. “민족(국민)국가는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이다. 빨리 민족(국민)국가를 해산하라!” “자유주의 민족(국민)국가는 죽었다. 그리고 아직 새로운 민족(국민)국가는 태어나지 않았다.” * 이 글은 말지 4월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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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윤/전 중앙대 철학과 강사 사람들이 쉽게 인정하는 가치를 뒤집어보고 싶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가치가 있으며, 이면을 통해 또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중앙대에서 강의를 맡은 바 있으며, 쉬운 일상의 언어로 '사회철학'을 담아내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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